2000년대의 홍대 거리를 기억하는가? 2000년대까지의 홍대 거리는 소규모 미술가들 혹은 인디 밴드들의 문화 중심지였다. 그러나 2000년대 후반부터 홍대에서 시작된 클럽 문화를 기점으로 급격한 산업화에 따른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현상이 일어났고, 기존의 예술가들은 합정, 상수역 주변으로 이동했다. 이후 홍대 상권의 산업화 파이가 점점 커지면서 이들은 다시 한번 망원동과 연남동으로 밀려났다. 이런 현상으로 ‘홍대’라는 지역에 대한 범위의 개념이 확장되었는데, 이전에 ‘홍대’라는 지역은 홍대입구역과 홍익대학교 사이의 영역이었다면, 현재는 그뿐만 아니라 주위 합정, 망원, 서교, 상수, 연남까지 포함하는 이른바 ‘범 홍대권’ 영역을 나타낸다. 이태원도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미군, 성소수자, 외국인 중심의 마을로 알려진 지역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치안이 좋지 않다는 인식 때문에 내국인들이 많이 찾는 동네는 아니었다. 그러나 2010년대 이후 연예인이 운영하는 맛집이 있는 동네로 유명해지며 인식 개선이 이루어졌고, 이전 세대보다 해외 경험이 있는 젊은 세대들이 그 경험을 재체험하거나 간접 체험하기 위해 방문하기 시작하면서 내국인들에게도 자주 찾는 번화가가 되었다. 국내 거주 외국인과 내국인, 그리고 해외 관광객들까지 두루 찾는 번화가가 되면서 이태원 또한 홍대가 겪었던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을 피할 수 없었는데, 해밀턴 호텔이 위치한 이태원역 일대를 중심으로 발달했던 상권의 영역이, 점차 녹사평역 근처 경리단길까지 확장되고 결국 해방촌까지 번져갔다. 나도 최근 1~2년간 이태원 해밀턴 호텔 거리를 갈 때마다 이전의 특색 있는 외국 음식점들은 사라지고 기업형 소주/호프 헌팅 포차들이 생겨나는 것을 보며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가장 늦게 영향 받았던 지역이긴 했지만 해방촌 또한 이 젠트리피케이션의 타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전보다 높아진 임대료로 기존 주민들과 상인들이 속속들이 떠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2016년 해방촌 마을 건물주, 임차인들이 모여 6년간 임대료를 동결하기로 합의해 타 이태원 상권 대비 비교적 낮은 임대료를 유지할 수 있었다. 덕분에 그나마 기존 내/외국인 거주민들과 특색 있는 이국적인 음식점들이 남아 있어, 개인적으로는 아직까지는 예전 이태원의 정취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해방촌 초입인 녹사평역 2번 출구부터 오르막까지 이어지는 신흥로에는 정말 유명한 세계음식 맛집들이 많은데, 찐하게 어센틱한 멕시칸 푸드를 선보이는 ‘엘피노 323’, 다양한 세계 맥주를 한국 슈퍼 분위기에서 즐길 수 있는 ‘우리슈퍼’, 한때 내장파괴버거로 유명했던 ‘자코비 버거’, 이미 아는 사람은 다 아는 피자집인 ‘보니스 피자 펍’ 등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작은 모로코를 이 해방촌 속에서 체험할 수 있다. 모로코 가정식을 맛볼 수 있는 ‘모로코코카페’, 모로코식 샌드위치 전문점 ‘카사블랑카’이다. 이 두 가게는 작은 골목을 사이로 서로 마주보고 있는데, 재밌게도 두 가게 모두 한 사장님이 운영한다. 10년 전 모로코에서 한국으로 유학을 왔던 ‘나시리와히드’ 사장님이다. 모로코는 아프리카 북서부 끝부분에 위치한 나라이다.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북쪽으로는 스페인과,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동쪽으로는 알제리 국경을 접하고 있다. 지리적 특성 때문에 토착민인 베르베르족의 문명과 페키니아 문명, 카르타고 문명, 그리고 이슬람 문명이 혼합되어 다양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 때문에 모로코 요리는 굉장히 다채로운 특성을 지닐 뿐만 아니라 국교인 이슬람 교의 영향으로, 이슬람 교리상 허용된 음식만을 섭취하는 ‘할랄 푸드’를 먹는다. 모로코의 대표적인 음식으로는 듀럼밀을 빻아서 잘게 만든 파스타 요리인 ‘쿠스쿠스’ 특유의 뾰족하게 솟은 용기에 여러 재료를 넣고 뭉근히 끓여내는 스튜인 ‘타진’ 우리에게는 ‘에그 인 헬’이라는 애칭으로 친숙한 ‘샥슈카’ ‘카사블랑카’는 사장님이 한국에서 할랄 푸드가 너무 비싸서 합리적인 가격으로 할랄 푸드를 즐길 수 있도록 처음 오픈한 식당이다. 주 메뉴는 샌드위치, 샥슈카, 렌틸콩 수프 등이다. 이후 맞은편에 ‘모로코코카페’를 오픈해 모로코 가정식을 선보였는데, 이곳에서는 모로코식 샐러드와 타진 등을 맛볼 수 있다. 둘 중 어디를 갈까 고민을 많이 하긴 했지만, 그날 음주가 예정되어 있어 음주 전에 샌드위치/버거/부리또 류로 배를 채우는 루틴을 지키기 위해 카사블랑카를 가기로 결정했다. 이 사진은 모로코코카페 바로 옆 커피숍에서 친구들 기다리며 찍은 카사블랑카의 전경이다. 카사블랑카는 대서양 연안에 있는 모로코의 아름다운 항만 도시로, ‘하얀 집’이라는 뜻을 지녔다고 한다. 근데 왜 분홍색이지…? 좀 더 가까이서 본 가게 외관. 사진을 자세히 보면 손님 중 대부분이 외국인이다. 가게에서 식사를 하는 도중에도 샌드위치를 테이크아웃해 가는 외국인들이 많았다. 아마 해방촌 주민들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전국적 유명세 뿐만 아니라 로컬들에게도 인정받는 식당이구나 싶었다. 다른 손님들이 있어서 테이블까지 포함된 내부 모습을 찍지는 못했지만, 아치형의 벽들과 조명, 벽에 걸린 그림들이 모로코 풍의 분위기를 내고 있다. 게다가 가게 외벽이 통창이어서 탁 트인 시야로 해방촌의 아기자기한 뷰를 맛볼 수 있다. 음료들과 맥주도 구비되어있다. 나와 친구는 맥파이의 IPA를 먹었는데, 그것도 나쁘진 않았지만 카사블랑카의 음식들과는 라이트한 라거류나 달콤한 애플 사이더 혹은 소다류를 먹는 것이 더 궁합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샌드위치 메뉴. 할랄푸드답게 소고기와 돼지고기류가 없고, 비건을 위한 메뉴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모로칸 치킨 샌드위치가 가장 대표적인 샌드위치라 볼 수 있지만, 양덕후인 나는 램 칠리 샌드위치를, 이미 치킨 샌드위치를 먹어봤던 내 친구는 쉬림프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샥슈카 메뉴. 몇 년 전 SNS상의 푸드 및 쿡방 페이지에서 ‘에그 인 헬’이라는 이름으로 소개해 우리에게 친숙한 음식이다. 실제는 북부 아프리카에서 유래한 음식으로, ‘샥슈카(Shakshuka)’라는 명칭이 본래 이름이다. 샥슈카가 지중해를 타고 중동 및 유럽으로 퍼지는 과정에서, 카톨릭 중심 유럽 국가에서 ‘Egg in purgatory(카톨릭에서 연옥. 지옥 전 단계의 사후세계를 뜻함.)’로 불리며 현재 이름으로 알려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계란과 치즈가 주가 되는 일반적인 샥슈카는 많이 먹어보았기에, 비건 샥슈카는 어떨까 라는 궁금증에 비건 샥슈카를 주문했다. 사이드 메뉴. 당근 샐러드, 렌틸콩 수프, 감자튀김이 있다. 렌틸콩 수프가 맛있다는 말을 들었지만, 많이 배고픈 상태가 아니어서 다음을 기약했다. 전체 주문 내역. 내돈내산 인증! 정말 합리적인 가격이다. 주문한 두 샌드위치와 비건 샥슈카가 나왔다. 일단 비주얼부터 다채롭고 진한 느낌이 난다. 쉬림프 샌드위치 단독샷. 이거 정말 물건이다. 대표 메뉴인 치킨 샌드위치를 아직 안 먹어 봤는데도 불구하고 다음엔 이걸로 주문할거다. 내가 좋아하는 향신료의 향으로 알맞게 시즈닝된 새우가 한입 베어 물 때 마다 톡톡 터지는 식감이 장난 아니었다. 친구가 주문한 샌드위치였는데 더 뺏어먹고 싶었다ㅠ 나의 램칠리 샌드위치. 이것도 맛있었다. 확실히 외국인 위주로 타겟한 식당이어서 그런지, 개인적으로 양고기를 먹을 때 중시하는 양고기 특유의 향이 제거되지 않고 제대로 살아있었다. 고수를 추가로 주문해서 산처럼 쌓아 먹었다. 고수+양고기+향신료 시즈닝.. 내가 좋아하는 조합. 또 하나 카사블랑카 샌드위치에서 인상적이었던 건 바로 바게트빵이었다. 눅눅해질 법도 한데 크리스피함이 살아있었고 소스에 젖어도 쫄깃함을 잊지 않고 씹으면 씹을수록 고소했다. 궁금했던 비건 샥슈카! 기존 샥슈카에서 계란 대신 감자, 진짜 치즈대신 비건 치즈로 대체해서 나왔다. 그리고 감자가 노란 빛깔을 띠고 안을 가르면 속살 또한 노란데, 강황으로 시즈닝을 했다고 한다. 샥슈카에도 저 맛있는 바게트가 딸려나와서 정말 좋았다. 아마 태어나서 ‘비건’ 음식으로 레이블링된 음식을 처음 먹어본 것 같은데, 맛있었다. 샥슈카 스튜 베이스가 워낙 훌륭했기 때문이다. 근데 솔직히 계란이랑 진짜 치즈는 못이기지 ㅋㅋ 샌드위치에 샥슈카를 소스 삼아 올려 먹으면 개꿀. 이 식사 이후 신나게 음주했는데도 다음날 숙취가 거의 없었던 걸 보니, 아무래도 맛있고 건강한 재료의 음식으로 속을 든든하게 채운 덕분인 것 같았다. 카사블랑카는 모로코의 대표 정통 음식을 먹기 위해서보다는 모로코 풍의 ‘진짜 맛있는 샌드위치’를 먹으러 가는 가게로 추천한다. 좀 더 ‘모로코모로코’스러운 식당을 원한다면? 카사블랑카 바로 맞은편 모로코 가정식을 선보이느 모로코코카페, 모로코 대사관 출신 쉐프가 운영하는 이태원의 마라케쉬나이트, 인테리어 분위기 깡패에 음식 맛도 좋은 샤로수길 낭만모로코 등을 추천한다. 해외여행이 언제 가능해질지 요원한 지금, 한국 속의 다른 나라를 탐험하는 수밖에!